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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가려지고, 눈은 열리고 | Pastor Benjamin Robinson

2026년 10월 18일 •5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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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성경 구절6 구절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걷고 계신데 당신은 그것조차 모를 때

소망이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고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믿고 있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길 이야기야말로 성경 전체에서 가장 우리 이야기 같은 본문일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걸어갑니다. 교회를 떠나고, 자기 인생을 걸었던 모든 것을 떠나 걸어갑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들의 꿈도 그분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 중 하나가 펼쳐집니다. 예수님이 친히 가까이 다가오시는데,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눈이 가려지는 것과 눈이 열리는 것 사이의 이 긴장은 단순한 역사적 호기심거리가 아닙니다. 혼란과 실망과 슬픔 가운데를 걸어본 사람,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계셨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지금도 살아 숨 쉬는 현실입니다.

무거운 마음끼리의 교제

이 두 제자, 글로바와 그의 동행자는 단순히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미묘하게 위험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실망을 중심으로 교제를 쌓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혼란스럽고 낙심되고 슬플 때, 우리에게는 반드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고통을 교제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과, 고통을 중심으로 교제를 세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앞의 것은 건강합니다. 뒤의 것은 함께 나누는 슬픔의 악순환에 당신을 가두어, 명료함 대신 혼란을 더 깊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두 사람이 함께 절벽에서 떨어졌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너 잡았어!"라고 외치며 같이 떨어지는 친구가 아닙니다. 단단한 땅 위에서 밧줄을 붙들고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제자들은 혼란 속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걸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작 그 대화 속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셨던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 두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호밀레오(homileō) — 깊이 파고드는 대화 — 를 나누고 있었고, 쉬제테오(suzēteō) — 열심히, 때로는 격렬하게 토론하는 것 — 를 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해 보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혼란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 혼란을 해석하는 데서는 서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무거운 마음끼리의 교제입니다. 모두가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를 놓고 논쟁하지만, 정작 답을 쥐고 계신 분에게로 돌아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등을 돌릴 때에도 다가오시는 예수님

이 이야기가 숨 막히도록 놀라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8절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그 순서를 완전히 뒤집으십니다. 제자들은 그분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는데, 그분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분은 그들을 덮치지 않으십니다. 극적인 정체 공개를 연출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가까이 다가와 질문 하나를 던지십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어찌하여 슬픈 빛을 띠고 있느냐?"

그들의 대화를 묘사하는 헬라어 단어 안티발로(antiballō)는 사실 탄도학을 뜻하는 단어의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무언가를 던지고 또 던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감정적, 지적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예수님이 조용히 들어오십니다. 그분은 그들의 감정 상태를 짚어내십니다. 그들의 슬픔을 알아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교제 속으로 자신을 초대하십니다. 강압이 아니라 은혜로 말입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스스로를 추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타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길 위에서, 당신의 엉망진창 한가운데서, 심지어 당신이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당신을 만나주십니다.

가려진 눈: 알아보지 못한 임재의 신비

16절은 이상한 말을 합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여기서 '가리어졌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붙들어 두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 그들의 눈이 또렷하게 보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알아보다'에 쓰인 단어는 에피기노스코(epiginōskō), 곧 알아차리고 인식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구분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분의 임재를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안다"라고 말하면서도, 인생에서 가장 힘든 그 길 위에서 바로 당신 곁을 걷고 계신 그분을 전혀 알아채지 못할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에서 이것을 아름답게 그려냈습니다. 이야기 속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아슬란은 예상치 못한 순간마다 등장하는데, 등장인물들은 무언가가 자신들을 깨뜨려 또렷이 보게 해 주기 전까지는 누가 자기와 함께 걷고 있는지 번번이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 당신은 그분을 알아봅니까? 주일 예배에서나 누가 봐도 분명한 기적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그 길 위에서는요?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요? 슬픔과 혼란의 한복판에서는요?

무엇이 눈을 열어주는가

결정적인 순간은 31절에 나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진 것입니까? 가려진 눈과 열린 눈 사이의 전환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단순하지만 심오한 일을 하셨습니다. 성경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구약 전체를 짚어가며, 모든 것이 영광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하는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동안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식탁에 앉아 그분이 떡을 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돌파구는 말씀을 통해, 그리고 성찬을 통해 왔습니다. 성경을 통해, 그리고 함께 나눈 식사를 통해 왔습니다. 벼락같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진리가 마음에 내려앉을 때까지 충분히 오래 함께 걸어주신, 참으시는 구주의 더디지만 신실한 일하심이었습니다.

이것이 당신에게 주는 의미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계절을 지나고 있다면, 품었던 소망이 무너져 내렸다면, 믿고 몸담았던 조직이나 공동체가 산산이 부서진 것처럼 보인다면, 이 본문은 바로 당신을 위한 말씀입니다.

첫째, 고통의 계절에는 누구와 함께 걷는지를 조심하십시오. 당신에게는 당신의 혼란을 똑같이 되풀이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 위에 믿음을 선포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함께 나눈 실망을 중심으로 가장 가까운 교제를 쌓지 마십시오. 당신의 고통을 믿음의 공동체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되, 그 고통 자체가 공동체가 되게 하지는 마십시오.

둘째, 당신이 보지 못할 때에도 예수님은 이미 가까이 계십니다. 그분의 임재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분이 계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 계절 동안 당신의 눈이 가려져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절은 영원히 계속되지 않습니다.

셋째, 눈이 열리는 길은 말씀과 공동체를 통과해 지나갑니다. 제자들의 눈은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주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실 때 열렸습니다. 가려진 눈에서 열린 눈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성경 속에 자신을 푹 담그고 식탁에 계속 붙어 있으십시오. 믿음의 공동체에, 예배에, 함께 떡을 떼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알아봄과 기쁨으로 끝납니다. 당신의 길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날 예루살렘을 떠나 걸어갔던 제자들은 해가 지기도 전에 달려서 그곳으로 돌아왔습니다. 눈이 열리면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당신의 실망을 싣고 갔던 바로 그 길이, 당신이 거의 포기할 뻔했던 공동체와 부르심과 그리스도께로 당신을 다시 데려다 줄 수 있습니다.

그분은 그 모든 시간 동안 당신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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