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은 지옥의 문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어느 날 이른 아침에 누가 당신을 깨워 배낭 하나를 건네주며 "여행 갈 거야"라고 말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목적지도, 일정도, 아무런 설명도 없습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가장 극적이고 가장 의도적으로 연출된 장면 중 하나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일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해수면보다 210미터가량 낮은 벳새다에서 출발해, 해발 340미터가 넘는 곳에 자리 잡은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까지 40~48킬로미터에 이르는 힘겨운 오르막길을 제자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고도 차이만 550미터. 꼬박 하루 반을 걸어야 하는 거리입니다. 마침내 도착했을 때 제자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당연한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예수님, 우리가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Pastor Benjamin Robinson은 마태복음 16장 13~17절의 이 결정적인 장면을 풀어내며, 왜 예수님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영적으로 적대적인 장소를 골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셨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을 사는 모든 신자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줍니다.
가이사랴 빌립보가 지구상에서 가장 으스스한 곳이었던 이유
가이사랴 빌립보는 그저 낯선 여행지가 아니었습니다. 1세기 유대인의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그 지역에서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장소였습니다. 세 가지가 그곳을 유난히 섬뜩한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첫째, 그곳은 헬라-로마 신전들의 집합소였습니다. 깎아지른 절벽 바위 면에 직접 파낸 정교한 벽감(壁龕) 안에는 헬라와 로마의 이방 신들을 새긴 거대한 신상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정기적으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훗날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20절에서 확증한 진리—모든 우상 뒤에는 귀신이 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유대인 제자들에게 이곳은 단지 불쾌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귀신 숭배가 이루어지는 현장이었습니다.
둘째, 그곳은 헤르몬 산 기슭에 있었습니다. 중간기 유대 문헌인 에녹1서는 헤르몬 산을 천사들의 반역이 시작된 지점, 곧 타락한 천사들이 인류를 타락시키기로 맹세한 곳으로 묘사합니다. 제자들이 그 문서를 권위 있는 성경으로 여겼든 아니든, 그것은 널리 읽히고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의 문화적 상상 속에서 이곳은 지상에서 귀신의 활동이 시작된 진원지였습니다.
셋째, 절벽 아래에는 동굴이 하나 있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그 동굴에서는 샘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습니다. 고대 헬라인들의 사고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동굴은 지하 세계로 통하는 문이라 불렸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실제로 그 동굴을 하데스의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지옥의 문 말입니다.
이방 우상들. 귀신들의 반역. 지옥의 문.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대화를 나누자.
하나님이 당신을 으스스한 곳으로 데려가실 때
여기서 Pastor Robinson은 많은 신자들의 경험을 정확히 찌르는 목회적 통찰을 내놓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어둡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처하면, 우리의 첫 반응은 "내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가셨나 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가이사랴 빌립보로 이끄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목적지를 의도적으로 고르신 분도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짐을 꾸리게 하시고 그 지역에서 영적으로 가장 적대적인 환경 한복판으로 곧장 행군시키셨습니다. 지도를 잃어버려서가 아니라, 오직 그 압박 속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계시를 끌어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어두운 곳을 돌아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한가운데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 아니면 결코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무언가가 당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는 이미 그들 안에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모든 것을 뒤바꾸는 대목이 여기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앉혀 놓고 신학 강의를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두루마리를 건네주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질문 하나를 던지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세간에 떠도는 견해들을 보고합니다.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 하나. 그러자 예수님은 초점을 좁히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베드로에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응답하십니다.
Pastor Robinson은 이것이 그 순간 예수님이 하늘에서 새로 내려받아 전달하신 정보가 아니었다고 지적합니다. 그 계시는 이미 베드로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목격한 모든 기적, 잔잔해진 모든 풍랑, 마음에 새긴 모든 가르침을 통해 그것은 이미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지상에서 가장 영적으로 적대적인 장소로 데려가신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있던 것을 끌어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늘로부터 한마디 말씀을 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신자들에게 이것은 깊은 진리입니다. 때로 당신이 찾고 있는 계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당신 안에 있으면서, 소리 내어 선포될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바를 고백하는 것의 능력
로마서 10장 9절은 이 장면 전체를 신학적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믿음의 본질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계셨습니다. 믿음은 마음의 믿음이 입의 고백과 만날 때 온전히 활성화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증인들 앞에서, 지옥의 문 앞에 서서, 이방 우상들과 귀신들의 역사에 둘러싸인 채 그것을 소리 내어 말했을 때, 그 계시는 살아 있는 선포가 되었습니다.
Pastor Robinson은 이를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권면과 연결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디모데전서 6장 12절). 적진 한복판에서, 실제 증인들 앞에서 드려진 고백에는 영적 무게가 실립니다.
그래서 장소가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안락한 회당 안에서 그 질문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원수의 영역에서, 바로 그 지옥의 문 앞에 서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곳에서 대답했을 때, 그 선포에는 어떤 안전한 장소에서도 만들어낼 수 없는 능력이 실렸습니다.
당신은 그분을 누구라 하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분이 누구신지를 온전히 입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교회에는 나오고 있었지만, 그분의 정체성과 개인적으로 정면으로 마주한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역 내내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겉으로는 겸손하고 평범해 보이는 표현이지만, 예언적 무게가 가득 실린 호칭이었습니다. 다니엘 7장에서 선지자는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영원한 나라와 권세를 받는 환상을 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칭호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고 계셨고, 제자들은 여전히 그 의미를 헤아리는 중이었습니다.
Pastor Robinson은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선생이 질문을 던지면 그것은 시험입니다. 그러나 좋은 선생은 가르치지 않은 내용으로 학생을 시험하지 않습니다. 답은 이미 주어져 있었습니다. 진리는 이미 손 닿는 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누군가가 그 순간 안으로 발을 내딛고 그것을 말하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같은 질문이 모든 세대를 가로질러 울려 퍼집니다. 그것은 신학적 추상이 아닙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입니다. 주석이 뭐라고 하느냐가 아니고, 당신의 목사가 무엇을 믿느냐도 아니며, 자라면서 무엇을 들었느냐도 아닙니다. 당신은 그분을 누구라 하겠습니까?
확신을 가지고 소리 내어 선포하는 그 대답이야말로, 모든 힘겨운 계절과 모든 어두운 골짜기, 그리고 "내가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싶었던 모든 순간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을 이끌어 오신 바로 그 지점일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