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점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교제
사람을 함께 묶어 두는 것은 무엇일까요? 결혼 생활을, 우정을, 혹은 교회를 떠난 사람에게 물어보면 대개 같은 대답이 돌아옵니다. 우리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설명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Lineage Church의 Pastor Benjamin Robinson은,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가장 영적으로 위험한 전제 중 하나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코이노니아 시리즈 두 번째 메시지에서 Pastor Robinson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같은 민족, 같은 인생의 단계, 같은 사회경제적 위치, 심지어 비슷한 성격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풀어냅니다.
코이노니아는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신약성경 전반에 등장하며 대개 "교제"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함께 나누는 식사나 주일에 나누는 악수보다 훨씬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코이노니아는 공통된 것, 함께 나누는 것, 무언가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과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는 그 실체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Pastor Robinson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가 단순히 모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모임인 것처럼, 교회는 단순히 교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곧 교제입니다. 진정한 코이노니아에서 빠져나와 있으면서, 동시에 교회의 삶에 온전히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 메시지의 중심 본문은 사도행전 2장 42~47절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모든 것을 서로 통용했다는 것. 바로 그 문장이 코이노니아의 심장 박동입니다.
자연스러운 교제가 가진 한계
사람은 본래 공유된 경험과 정체성을 통해 가까워지도록 지어졌습니다. Pastor Robinson은 골프 이야기로 이 점을 아주 친근하게 보여 줍니다. 26년째 골프를 쳤지만 여전히 잘 치지 못한다고 솔직히 인정하는 그는, 공항에 들어서다가 Titleist 모자를 쓴 낯선 사람을 발견하는 순간 곧바로 형제애가 솟아오른다고 말합니다. 소개도 필요 없습니다. 함께한 역사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의 공통된 관심사가 즉각적인 연결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 취향 중심의 교제가 일상생활에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세우는 일차적인 기준이 되어 버리면, 무언가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런 기준으로 서로를 분류하기 시작합니다.
- 민족과 문화적 배경
- 나이와 인생의 단계
- 사회경제적 위치
- 같은 언어나 말씨
- 아이들이 또래인가 아닌가
모두 자연스럽고 충분히 이해할 만한 범주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6절에서 교회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부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토대는 우리가 본성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초자연적으로 공유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바벨의 역전
사도행전 2장이 왜 그토록 혁명적인지 이해하려면 그 자리에 모인 무리를 알아야 합니다. 오순절은 당시 알려진 세계 전역에서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으던 세 개의 큰 절기 중 하나였습니다.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에 사는 사람들. 조상의 신앙은 같았지만 여러 세대에 걸쳐 서로 다른 나라에서 살며,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문화를 흡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의미에서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 기적은 말하는 것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듣는 것의 기적이기도 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자기 고향의 언어로 그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페르시아 말로 들었습니다. 또 누군가는 바대 말로 들었습니다. 또 다른 이는 메대 말로 들었습니다. 그들은 디아스포라의 공용어인 헬라어로 서로 대화하고 있었지만, 각 사람은 자기에게 가장 깊이 와 닿는 모국어로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Pastor Robinson은 강력한 대조를 끌어냅니다. 바벨탑에서 하나님은 언어를 사용하여 인류를 흩으셨습니다. 오순절에 하나님은 언어를 사용하여 흩어졌던 자들을 하나로 모으셨습니다. 방언의 기적은 혼란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요엘의 예언으로 그 순간을 해석하고 예수님을, 곧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과 주 되심을 전했습니다.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하루 만에 교회에 더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그들에게는 아무 공통점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공통된 것이 되었습니다.
주도 한 분,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이것이 에베소서 4장의 신학적 핵심입니다. 바울은 문화적 친밀감 위에 하나 됨을 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일곱 겹의 토대 위에 하나 됨을 세웁니다.
- 한 몸 — 우리는 같은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 한 성령 — 우리 모두 안에 같은 성령이 거하십니다
- 한 소망 — 우리는 같은 영원한 목적지를 향해 갑니다
- 한 주 —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주가 되십니다
- 한 믿음 — 우리는 같은 사도적 복음을 붙듭니다
- 한 세례 — 우리는 각자 같은 공적 고백을 했습니다
- 한 하나님 아버지 — 우리는 모두 같은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이것은 취향이나 성격의 목록이 아닙니다. 신자로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 주는 가장 깊은 실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로 우리가 함께 나누는 것이라면, 나이도 배경도 피부색도 소득도 언어도, 그 밖의 모든 차이는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이것이 지역 교회에 주는 의미
그곳 사람들과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는 이유로 교회를 떠나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이 메시지는 도전이자 초대입니다. 질문은 당신이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취미나 인생의 단계나 문화적 배경을 공유하느냐가 아닙니다. 질문은 같은 주님, 같은 성령, 같은 소망을 함께 가지고 있느냐입니다.
그 대답이 "그렇다"라면, 당신은 정말로 중요한 모든 것을 이미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코이노니아는 우리에게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요구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면서 말입니다(에베소서 4장 1~2절). 이것은 수동적인 관용이 아닙니다. 세상이 만들어 내지도 못했고 만들어 낼 수도 없는 하나 됨을 향한, 성령이 능력 주시는 적극적인 헌신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초대 교회는 인구 통계로 묶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활로 묶였습니다. 그들은 소유를 나누었고, 날마다 함께 떡을 떼었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셨습니다.
올바른 토대 위에 뿌리내린 코이노니아는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받은 것 위에 세워진 교제입니다.